38년 된 병자를 고치심
본문 말씀을 통해 묵상해 볼 주제들:
(1)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죄인임이 깨달아지는 것이다.
(2) 사마리아 여인과 병자의 마음을 비교해 보기
(3)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적용해 보기
(4) 귀신이 나갔다가 더 강한 귀신을 데리고 다시 들어온다는 말씀을 적용해 보기
(5) 예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뜻을 이해하기
(6) 죄로 인한 병이 있음 – 완전한 치유는 죄에서 자유를 얻어야만 가능하다.
(7) 병을 고치는 것이 소원이 아닌, 병을 갖고라도 구원받는 것을 소원해야 한다.
(8) 기적으로 병 고침을 받는 것으로 구원도 받았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9) 예수님께 구해야 할 것 – 눈에 보이는 땅에 것들, 육에 속한 것들이 아니라 영생이다.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많은 병자가 낫고자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는 베데스다라는 못에 가셨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5-7)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있는 중에 38년 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못 옆에 누워있던 병자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그런데 병자는 낫고 싶다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자기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서 다른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간다고 답한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쳐주시려고 그에게 오셨음에도 바로 고쳐주시지 않고 낫고 싶은지를 물으셨다. 어쩌면 병자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질문이 아닌가? 그럼에도 그렇게 물어보신 이유와 목적이 있다. 그 질문으로 병자의 속에 있는 것들이 흘러나오게 하신 것이다. 앞서 살펴본 4장에서 상한 심령으로 자신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갈망하던 사마리아 여인과는 달리 이 병자는 38년 동안의 긴 환난과 고통 중에 있었음에도 여전히 그의 마음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처참한 병에 걸릴 만큼 큰 죄를 짓고 살았음에도 자신의 죄를 깨닫지도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상한 심령과 비참함을 인정하지도 못했다. 도리어 병자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물에 들어가는 것을 볼 때마다 그 사람으로 인해 자신이 낫지 못한다고 불평하며 자신을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에 분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을 건드리셨을 때 내면을 채우고 있었던 불평과 분노가 튀어나온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8-9)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4)
예수님은 병자의 죄를 보시고 아직 구원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음도 아셨지만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육신의 병을 고쳐주셨다. 병자는 38년이나 자신을 괴롭히던 병에서 낫게 되었는데도 자신을 낫게 해주신, 영생을 주실 수 있는 예수님께 주목하지 못했다. 그는 병이 나았음으로 인해 기뻐 뛰지도, 사람들에게 외치지도, 예수님께 감사하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이 감사할 수 없고 복음을 받을 수도 없도록 죄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그는 육신의 병은 고침 받았지만, 사마리아 여인처럼 죄의 권세에서 풀어지는 영적 자유와 복음은 받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환란을 당하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탓하며 자신이 죄인이 아닌 오히려 피해자라는 거짓 신념에 갇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신 것이 자신이 받을 만한 것이라고 믿는 교만함으로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를 다시 만나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으로 이 병자는 죄로 인해 병들었음을 알 수 있다. 에베소서 4장 26-27절 말씀처럼 죄와 분노로 사탄에게 틈을 주어 악한 영들이 그 틈을 타고 병자 안에 들어가 죄 가운데 둥지를 틀고 거하며 병을 주었을 것이다. 자신의 병이 죄로 인한 것임에도 죄를 깨닫고 후회하거나 뉘우치지도 않고, 어둠에 종노릇하며 육신의 병까지 얻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죄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자신의 육신을 상하게 하는 반복된 죄의 결과로 병을 얻을 수 있다. 중독, 에이즈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죄로 인해 사탄이 틈을 타고 역사하여 병을 줄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죄로 인한 것인 줄 아시면서도 병자의 병을 고쳐주셨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으로 모든 병자가 낫기를 간구할 수 있다. 그렇지만 본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죄로 인한 병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병이 나을 경우 다시 더 악한 병에 걸릴 수 있기에 병이 치료받는 것에 앞서 그 영혼의 죄사함과 구원을 위해 먼저 간구하고 기도해야 한다. 요한 3서 1장 2절에 영혼이 잘 됨같이 강건하기를 간구한 것처럼 육신의 강건함도 구원으로부터 말미암아야 한다. 설령 육신의 병은 고침 받지 못할지라도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면 감사와 기쁨으로 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고 육신의 병은 고침 받았어도 여전히 영혼이 죄에 묶여있다면 계속해서 죄에 종노릇하게 될 것이고 더 큰 병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죄인들은 영적 세계와 영적 진리를 깨달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 중에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이 진리를 알지못한다. 병은 무조건 불행한 것이고 반드시 고침 받아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병으로 죽는 것은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것이라 생각한다. 영생에 관한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온전하지도 완전하지도 못한 육신은 갖가지 병에 걸릴 수 있다. 죄로 인해, 건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 인해, 나이를 먹으며 쇠태함으로 인해서도 병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죽는 것은 불행하거나 불쌍한 것이 아니다. 영생을 소유한 자에게는 주님의 품에 안기며 죽음과 저주로 인해 파괴되고 오염된 이 땅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는 기쁨과 안식과 영광으로 들어가는 최고의 일이다. 그러니 믿고 거듭난 자들은 병에 걸리는 것과 죽음에 대해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니 진정 거듭난 자라면 똑같이 생각할 수가 없다! 거듭났다는 증거가 죽음에 대한 자유와 죽음 후에 펼쳐질 영생에 대한 기대와 확고한 소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듭난 크리스천들은 병자에 대해 먼저는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병났기를 간구해야 한다. 구원받은 병자들을 위해서는 어떤 이유로 그 병을 얻었는지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도록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의 병을 고쳐주심으로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때로는 병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려는 도구일 수 있고, 하나님께 더 깊이 나아가며 영적 성장과 성숙을 이루기 위함일 수도 있고, 병으로 인해 그 주변 사람들이나 집안이나 공동체에 영혼 구원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만이 이루어지길 간구하며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이 영적 진리를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기도할 수 있을 때 병에 걸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병자를 위해 기도하며 “낫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에서 자유로와 질 수 있다. 나는 병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 병을 고쳐주시기를 구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와 그의 가족들이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영혼 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 이루어졌고, 그가 영생을 얻었다는 증거이고 그가 병으로 당장 세상을 떠나게 될지라도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최고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관점과 가치대로 좋은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 병자를 대조하며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병자 중에 이 병자를 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알려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외모만 보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아신다. 우리가 불쌍하다고 여기는 것은 그의 외모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우리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신다. 우리는 그저 병자의 겉으로 나타난 병든 모습만 보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에 죄를 보신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처럼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자와 오늘 병자와 같이 죄를 용서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자가 있음을 알려주신다.
본문과 마가복음 4장 1-13절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함께 묵상해 보면 각각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영적 세계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세계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사람이며 어떤 상황에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자신의 성품과 행동을 주관하는 것이 무엇이며 지.정.의는 어떻게 일하며 사고 체계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등 사람의 내면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며 어떤 일들을 하며 어떻게 영적인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 성령님께서 점점 더 선명하게 이것들을 깨달을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인도하신다. 또한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이런 영적 진리를 먼저 깨닫고 배워서 가르침으로 성도들도 성령님의 인도를 받도록 도와야 한다.
지금까지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것들, 영적 세계와 사람들의 내면세계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사람들은 자신이 눈으로만 보고 아는 경험들과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제”와 말씀에 숨겨진 “영적 진리”들을 깨달아야 하고 그것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씨뿌리는 자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우선은 자신의 내면을 제삼자의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내면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 세계에 눈이 떠져서 그 내면세계가 사탄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와 어떻게 연결되고 속하게 되는지를 배워야 한다. 또한 복음(말씀)을 믿고 거듭나기 위해 예수님의 비유처럼 그 사람의 마음 밭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성령님께 계속 물으며 인도하심에 따라 자기 자신과 각각의 영혼을 돌보고 마음밭을 살피며 인내함으로 구원으로 인도해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38년 된 이 병자가 예수님께 고침 받던 때는 그 마음 밭이 준비가 되지 않아 죄로부터 자유를 얻지는 못했지만, 주님이 그에게 찾아가 주심으로 그에게 구원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 먼저 믿은 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그에게 말씀의 씨앗을 뿌리시고, 그의 주변 환경과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그의 마음 밭을 옥토로 기경해(흙갈이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일하시며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께서 이 병자에게도 동일하게 구원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한다면 우리가 아닌 성령님께서 우리로 모든 것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혼 구원의 역사에 우리를 동참하도록 부르시고 사용하실 것이다. 나는 38면 된 그 병자가 예수님을 만났기에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게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성경에 귀신이라 칭하는 사탄에 속한 악한 영들은 사람들 내면의 음란, 분노, 악함, 거짓, 미움, 용서하지 못함, 시기, 교만…… 등과 같은 마음속의 오래된 죄 가운데, 그 죄를 회개함으로 용서받기 전까지 합법적으로 둥지를 틀고 거할 수 있다. 사탄이 어둠의 권세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귀신 들려 귀신에게 조정을 당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이 세상 어느 곳 혹은 사람들의 내면에조차 죄로 어둠이 있는 곳은 사탄이 왕 노릇할 수 있으며 악한 영들이 그 어둠 속에 거하며 죄가 빛 가운데 드러나지 못하도록 하고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하여 복음을 듣지도 믿지도 못하게 방해할 수 있다. 오랜 시간 회개하지 않고, 죄를 계속 짓는 사람들 속에 견고한 진을 짓고 그 속에 죄를 숨기고 거짓말과 유혹으로 악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기도를 끊게 하고 말씀을 읽지 못하게 하고 교회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게 할 수도 있다. 교회는 다녀도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도록 할 수 있고 말씀이나 기도가 아닌 교회 일에 열심을 내게 하거나 종교 생활을 하게 할 수 있다. 한 영혼이라도 구원받지 못하고 죽게 하는 것이 사탄과 악한 영들의 일이다. 베드로전서 5장 8-9절 말씀처럼 날마다 근신하고 깨어서 회개하며 사탄과 그의 악한 영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대적하고 쫓아내야 한다. 정말 날마다 회개해야 한다. 많은 크리스천이 사탄과 악한 영들이 지금도 쉬지 않고, 불화살을 쏘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 것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시하고, 영적 전쟁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서 거짓에 속아 힘없이 당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스스로 말씀을 읽어 배워야 한다. 교회에서 가르쳐야 한다. 성령님을 따라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상한 심령과 죄인을 찾아 이 땅에 오셨다. 그들이 복음을 받고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병자는 예수님을 만나 나음을 얻었지만, 아직 그 마음에 복음을 받고 믿을 수 없기에 또다시 죄를 지으면 금세 더 많은 악한 영이 죄를 타고 들어와 더 심한 병을 얻게 될 것을 예수님이 아시고, 병자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12장 43-45절의 말씀과 같이 말씀(복음)으로 그 마음이 채워지고, 주님께서 마음의 주인이 되시지 않으면 쫓겨났던 어둠의 영이 더 악한 영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와서 이전보다 더 심한 상태가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이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듣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0-12)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이는 예수라 하니라 (14)
이 병자는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죄를 범했다고 지적하자 예수님께서 시켜서 했다며 예수님께 죄를 돌린다. 또한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나 자신을 고쳐주신 이가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자 유대인들에게 스스로 찾아가 자기를 고쳐준 사람이 예수라고 고발한다. 감사는커녕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도 예수님께서 찾아가 주셨다.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에게도 긍휼을 베푸시고, 병을 치유해주시고 죄에서 떠나라고 살길을 알려주셨다. 이 병자와 같은 죄인도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 이 땅에 오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16-18)
38년 된 병자보다 더 심한 병에 걸린 유대인 영적 지도자 무리가 있었다. 38년 된 병자보다 더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들이 이미 죄로 죽은 죄인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시지 않고,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 된 자로 여긴다는 것을 죄목으로 들었지만 실제로는 교만과 위선과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기득권에 위협이 되고 자신들의 죄를 낱낱이 드러내시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이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앞장서는 저들이 실은 사람들을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로 인도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해야 할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저들이 영적 눈이 먼 장님 리더들이 되어서 사람들을 등에 업고 낭떠러지로 달려가서 자신들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까지 죽게 한다는 것이다.
유대 영적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가복음 2장 27절 말씀처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음도 예수님께서 참 안식일의 주인이심도 알지 못했다. 또한 예수님께서 당신이 메시아로 오셨음을 나타내는 많은 표적을 보이셨음에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인정할 수가 없었다.
** 이 묵상 글은 여기까지로 마무리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5장 (2) 편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누구신지에 대해 친히 말씀해 주시는 것과 연결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