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심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2)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표적의 진짜 의미는 깨닫지 못했다. 표적을 목격하면서도 예수님께서 표적을 보이시며 저들이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과 달리 저들은 이 세상에 속한 제한된 이성과 죄 된 본성대로 표적을 해석한다.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표적을 보며 저들은 자신들이 원하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세상 임금을 보았다. 병을 고쳐주는 것뿐만 아니라 배도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아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자신들 모두가 죄로 죽었으며,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으며, 곧 하나님 앞에 심판받게 될 거라는 참 현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참된 양식이 무엇인지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저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 같다고 하시며 불쌍히 여기셨다. 물론 저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은 영적인 것에만 있지 않다. 친히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육신의 고통과 아픔과 굶주림까지도 체휼하신다. 다만 임시방편처럼 치유하고 먹을 양식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실 수 없고 영원한 안식과 행복과 양식을 주기 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에게 영적 세계에 대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죄로 죽은 저들의 진짜 현실에 대해 가르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5-6)
예수님께서 빌립을 시험하신다. 예수님은 “어디서” 떡을 얻겠는지 물으셨다. 2년 동안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으면 이쯤에서는 “예수님, 우리에게 떡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능치못하심이 없음을 아나이다”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빌립과 제자들 역시 무리와 다르지 않다. 예수님께서 아직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길을 열어주시지 않았기에 깨달을 수 없었다. 빌립은 이 땅의 계산에 뛰어나다. 무리를 먹이기 위해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다고 답한다. 얼마만큼의 떡이 필요한지는 계산할 수 있지만 그 떡을 무리에게 줄 방법이 없다는 것에는 조금의 의심도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모든 것을 이루신 후 성령을 받은 빌립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표적들은 물론 순간이동(?)까지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능력의 사도가 된다. (사도행전 8장) 빌립은 이 당시 자신이 그렇게 될 거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영생을 얻은 후에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어 상식과 이성을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일들을 행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빌립과 제자들 그리고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은 죽고 예수님께서 저들 안에 사시며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만 이루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마태복음 14:16, 마가복음 6:37, 누가복음 9:13) 예수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제자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겠지만,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이 머지않아 수많은 사람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며 그들을 먹이는 것을 보고 계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생명의 양식으로 이 땅의 죽은 영혼들을 살려낼 것을 아셨다. 제자들은 그것을 위해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님은 곧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사심으로 제자들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생명의 길을 열어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셨지만, 성령 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영의 양식으로 먹였는가!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요한복음 14:12)라고 하신 말씀이 성취되었다.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마가의 기록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마가복음 6:36)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이 없이도 떡을 만들어내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저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찾으시고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사용하셔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유는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함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에서 유를 만들라고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부르신 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과 지금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필요한 것을 모두 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생명 안에 모든 것이 있다.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의 가진 것으로 우리의 어떤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 안에 거하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유의 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할 때 능치 못 할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부르심은 이미 주어진 생명으로 생명을 낳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복음을 전하여 죽은 영혼들을 먹이고 살리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축복으로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필요한 곳곳에 흘려보내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사랑을 세상에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네가 떡을 나누어주라고 부르실 때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가진 것이 없고 능력이 없다고, 방법이 없다고 핑계 댈 수 없다.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 위에서 모든 피를 흘리시고 부활하심으로 다 이루신 후에 우리 안에 성령님으로 거하시기 때문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서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8-9)
한 어린아이의 도시락,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 분명 작은 사이즈의 떡과 물고기였을 것이다. 그 도시락을 예수님께 내밀던 안드레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자신이 그것을 예수님께 가지고 왔지만, 그것으로 오천 명을 먹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드레가 그 도시락을 예수님께 가지고 온 것은 예사로운 행동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셨을지라도 어린아이의 작은 도시락은 무시해 버리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말했지만, 그 도시락을 들고 예수님 앞에 온 안드레에게는 예수님을 향한 기대가 조금은 있어서 예수님이 찾으신다면 그것으로 뭐라도 하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을 것 같다.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내어드리는 어린아이와 안드레의 순종이 오천 명을 먹이는 놀라운 일을 일으킨 것이다. 위에서 나눈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 주신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두 손에 움켜쥐고 내놓지 않아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지 못할 때가 많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나에게 맡겨주신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마땅한 자세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며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에 나누고 흘려보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고 더 풍성히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얼마나 값진 것인지, 얼마나 많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민감하게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을 보며 나에게 있는 것을 인색함이 없이 내어드리는 순종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 내놓기만 하면 된다. 기쁘게 드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며 순종하는 자들로 그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해주신다. 자신의 도시락을 안드레에게 기꺼이 내주었던 어린아이는 자신의 도시락을 통해 예수님께서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을 배불리 먹이신 것을 보고 어땠을까? 얼마나 기쁘고 자랑스럽고 가슴벅찼을까? 평생 잊지 못할 일일 것이다. 일평생 그날을 사람들 앞에 간증했을 것 같다. 평생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1)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시고 동참하시며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표적을 행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주도권을 잡고 일하신다. 제일 먼저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무리 중에 가지고 있는 음식을 찾게 하시고 무리를 앉히게 하시고 음식을 나눠주는 일을 맡겨주셨다. 다음으로는 어린아이를 부르셔서 작은 도시락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순종을 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제는 그곳에 모인 이만 명에 가까울 수 있는 무리를 예수님의 일하시는 가운데로 부르신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순종해야 그 일에 동참할 수 있다. 예수님은 무리로 떡과 물고기를 받아먹을 수 있도록 50여 명씩 무리를 지어 앉게 하셨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질서 가운데 순종하여 앉아 예수님의 일 하심을 기다리던 자들에게 배불리 먹을 떡을 주셨다. 제자들과 어린아이와 무리 각각 부르심과 역할에 따라 순종할 일이 다르지만 각자 예수님의 일 하심에 동참하고 순종함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저들의 영적 육적 굶주림을 채워주시기 원하셨던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은 완벽하다. 디테일한 부분까지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나는 예수님께서 음식을 나눠주시기 위해 50명씩 무리를 지어 앉게 하신 것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만 알려주시고 나머지는 우리가 모두 알아서 하라고 하신 듯 사역하지 않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닌, 지금 일하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을 보지도 않고 기도로 묻고 듣지도 않고 무시하며 하나님의 뜻을 내 뜻과 내 방법대로 이루려는 죄를 짓는다. 성령님의 일하심을 가로막고 내가 앞서 일을 주도해 가는 죄를 짓게 된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과 때와 방법과 필요한 것들과 능력과 연관된 모든 상황과 환경까지 고려하셔서 완벽하게 계획하시고 주도적으로 이루신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때에 일을 이루시기에 그 일은 완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시고 맡겨주시는 일에 그저 순종함으로만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어떠함이 하나님보다 뛰어나서 감히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열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 낼 수 있겠는가! 본문의 제자들과 어린아이와 무리와 같이 각각의 부르심과 맡겨주신 일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만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 크기의 일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보리떡과 물고기를 먼저 축사하심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나타내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시는 일이 아님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순종하시는 일임을 나타내셨다. 또한 축사는 감사기도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시려는 일이 하나님이 원하셔서 친히 일하고 계시는 것을 믿기에 구하는 기도가 아닌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는 것이다. 그리고 축사 후에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떼어 나눠주시는 순종으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이루실 줄 믿고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임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완벽하게 이루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믿음으로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다. 또한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 일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지를 통해 나의 믿음을 점검해 볼 수 있다. 하나님께 내가 계획한 대로 이루어 달라고, 내가 구하는 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에서 한 발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주심에 감사하는 기도를 먼저 드릴 때 하나님도 기뻐하심으로 나를 통해 당신의 일을 이루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나눠주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나눠주시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받아 가게도 할 수 있었겠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게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에서 끊임없이 떼어주시는 떡과 물고기를 받아 나르는 동안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들은 이 놀라운 기적을 직접 경험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훈련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통해 열리는 영적 세계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제자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 당연하다. 어쩌면 이런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의 좌우편에 자신이 앉아야겠다는 죄 된 자아에서 흘러나오는 마음을 더 확고히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성령님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죄 된 옛 자아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새 마음과 새 영으로 새 사람을 입은 후에는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마음을 밝히 깨달았음을 성경이 증언한다. 영적 눈과 귀가 열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메시아를 만났을 때 비로소 세상 임금이 되실 예수님의 좌우편을 탐하던 자들은 재림하셔서 영생으로 인도하실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을 전하기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놓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로 거듭났다. 예수님께서 제자 삼으셔서 이루시기 원하셨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제자들이 된 것이다.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2-13)
이만 명에 가까울 수 있는 사람들이 먹고 싶은 데로 배불리 먹고도 떡과 물고기가 열두 광주리나 남았다.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도리어 차고 넘쳤다. 남은 것들은 한쪽에 두었다가 무리가 돌아갈 때 집에 남아있는 식구들을 위해서, 생각나는 이웃을 위해서 몇 개씩 들고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에는 모자람이 없다. 모세를 통해 주었던 이 땅에 속한 만나는 하루하루 먹을 양식으로 주어졌고 남은 것은 썩어버렸지만 (출애굽기 16장)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은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들을 거둘 수 있었다. 썩지도 않는 영원한 양식이었다. 구하기도 전에 배고픔을 먼저 아시고 먹여주시는 양식이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14-15)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세 번째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다. 2년이란 시간 동안 예수님은 친히 구원을 이루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자신에 대해, 죄와 심판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 곧 영적 세계와 영생에 대해, 복음에 대해 가르치셨다. 자신이 오실 메시아이심을 증언하는 많은 표적을 보이셨다. 그 모든 것들을 듣고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그중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를 따랐다. 하지만 저들의 영적 눈과 귀가 닫혀있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아직은 이해하지도, 깨닫지도 못했다.
떡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은 자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지금도 예수님 같은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대통령으로 삼으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최고 부자 나라로 잘 먹고 잘살려고 할 것이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하나님이 왜 필요하겠는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뜻을 품고 있는 저 무리에게서 예수님은 피할 수밖에 없으셨다. 저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영의 양식이고 육신은 배부를 지라도 영은 죽었기에 살리는 생명의 양식이 필요한데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육신의 배만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는 저들을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오병이어 기적에 관하여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신다. (다음 나눔에 이어집니다.)